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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망경] 도망자

1960년대 중반경 미국과 한국을 휩쓸었던 미드 ‘도망자, The Fugitive’를 기억하는가. 아내를 죽였다는 누명을 쓴 채 제라드 경위에게 쫓겨 다니면서 자신의 무죄를 밝히기 위하여 ‘외팔잡이 사내’를 잡을 때까지 미 전역을 방황하던 소아과의사 리처드 킴블의 어두운 얼굴을.   ‘도망자’는 도망할 逃, 망할 亡, 놈 者, 나쁜 뜻이다. 어릴 적에 한자어 ‘亡’자를 무서워한 적이 있다. 사실은 지금도 좀 그렇다. 니은자에 뚜껑을 위태롭게 얹어놓은 것 같기도, 상투가 달린 디귿자처럼 보이는 망할 亡.   늙거나 정신이 흐려서 말과 행동이 정상을 벗어난 치매 상태를 뜻하는 망령(妄靈). 기억력이 완전 망가진 망각(忘却), 사방팔방 검푸른 파도만 출렁이는 망망대해(茫茫大海). 망중한(忙中閑). 정치적 이유로 본국을 떠나는 망명(亡命). ‘망’이 들어가는 말이 많기도 하다.   ‘妄靈’은 그렇다 치더라도 ‘亡靈’은 죽은 사람의 영혼을 뜻한다. 저 상투 달린 디귿자, 亡에는 ‘망하다’라는 뜻 외에 ‘죽다’라는 뜻도 있어요. 亡人은 죽은 사람을 일컫는다.   당신은 누구를 미워하며 혼잣말로 욕할 때, ‘亡할 자식!’이라 나직이 내뱉은 적이 있다. 그때 당신 심정은 한 사람의 죽음을 원하는 저주심의 발로가 아니었다. 일순간 그가 하는 일이 망하기라도 바라는 부정적 감성을 표출하는 심리상태였을 뿐.   ‘perish’라는, ‘亡하다’에 꼭 맞는 영어단어가 있다. 링컨의 1863년 게티즈버그 연설에 나오는 격식 있는 말이다.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지구상에서 멸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본인 譯)   ‘perish, 망하다, 죽다’는 전인도유럽어로 ‘가다, (앞으로) 나아가다’라는 뜻이었다. 당신과 내가 입에 달고 사는 현대영어 유행어, ‘move forward, 앞으로 나아가다’와 한치도 다름없는 의미라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컬하다.   더 대경실색할 일은 이 점잖은 문예체 단어가 관용어로 쓰여서, “Perish the thought!” 하면 “그런 생각은 집어치워라, 어림없어, 말도 안 돼, 꿈도 꾸지 마!”라는 뜻의 구어체로 돌변한다는 것이다. 아이구 참, 이 亡할 놈의 슬랭을 어찌하면 좋으냐.   내 비록 독실한 불자(佛者)는 아니지만, 당신도 여러 번 들어본 적이 있는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이 나오는 반야심경 마지막 구절, ‘아제아제바라아제바라승아제모지사바하’를 읊조려 볼까 한다. 이 부분에 대한 몇몇 해석 중 내 생각을 자주 차지하는 해석은 이렇다.   ‘가자가자. 건너가자. 완전히 건너가서 아뇩다라삼먁사보리(모지)를 성취하자’. 여기에서도 사뭇 어디로, ‘가자’는 제의가 나오면서 “Let’s move forward!” 하는 우렁찬 목소리가 귓전을 때리는 듯하다.   어디로인지 간다는 발상은 정체하지 말고 끊임없이 움직이라는 뜻이 아닌가 하는데. 그것은 자발적인 거동일 수도 있지만 무엇에 쫓기듯이 난경을 도피(逃避)하는 행각일 수도 있겠다. 우물쭈물하지 말고, 어서 냉큼 도망(逃亡)치라는 말이다. 자신의 결백성을 되찾기 위하여 속세의 강을 가로질러 외팔잡이 사내가 숨어있는 피안으로 건너가라는 전갈인 것이다. 의사 리처드 킴블처럼 얼굴을 찌푸리면서. 뭐라고? “Perish the thought?”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도망자 색즉시공 공즉시색 소아과의사 리처드 외팔잡이 사내

2025-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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